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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 짙게 바르고 ― 가버린 사랑의 노래가 다시 돌아오다

임주리의 인생, 김희갑과 김수현의 예술이 만난 순간

임주리의 인생, 김희갑과 김수현의 예술이 만난 순간

1987년, 한 곡의 노래가 탄생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제목만 들어도 짙은 향수처럼 마음속에 스며드는 이 곡은, 작곡가 김희갑과 작사가 양인자 부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명곡이다. 이들은 당초 가수 이은하를 염두에 두고 이 곡을 썼지만, 뜻밖에도 가수 임주리가 먼저 손을 내밀며 그녀의 목소리로 녹음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별 반향이 없었다. 임주리는 실망 속에 미국으로 떠났고, 노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그 멜로디가 다시 울려 퍼졌다. 1994년, 배우 김혜자가 드라마 〈엄마의 바다〉에서 이 노래를 흥얼거리자 시청자들의 귀와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드라마의 극작가는 김수현. 작사가 양인자와는 오래된 문학적 인연으로 얽힌 사이였다. 김수현의 작품 세계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 이 노래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노랫말을 다시 되새기게 만들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아 / 속절없는 사랑아…”

사랑은 짧고, 입술엔 립스틱만이 남는다. 이 노래는 사랑의 덧없음을 '짙게 바른 립스틱'이라는 상징으로 담아낸 절창이다.

그렇게 7년 만에 다시 불붙은 인기에 힘입어 임주리는 귀국했고, 1995년 KBS 가요대상을 수상하며 당당히 무대에 복귀한다. 이후 〈사랑할 때 용서할 때〉, 〈사랑의 기도〉, 〈가버린 사랑〉 등의 연속 히트로 1990년대 대표 여가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임주리의 삶은 노래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교제 중이던 남성이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 시애틀로 떠난다. 그곳에서 1993년, 아들 이진호를 낳고는 생후 22일 된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아들이 바로 트롯 가수 재하다. 어머니의 무대를 따라다니며 자란 그는 KBS <트롯 전국체전> 준우승, MBN <현역가왕2> 출연등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재하는 무대 위에서 종종 말한다. "어머니의 길을 따라 걷고 싶다"고.

◉재하노래: 연인https://youtube.com/watch?v=RkPJn2L8l_U&si=ofm6E80NeGh2M1RC

한편, 작곡가 김희갑은 1936년 평양 태생으로, 6·25 전쟁 중 월남해 대구에서 자라났다. 재즈 기타리스트로 음악을 시작해, 밴드 ‘키보이스’의 프로듀서, 그리고 수많은 가요 히트곡의 주인공으로 활동했다. 그는 아내 양인자와는 물론, 김수현, 박건호, 지명길등 당대 최고 작사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한국 대중가요 3대 작곡가' 중 하나로 불린다. 그는 매일 아침, 아내를 로맨틱한 기타 선율로 깨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음악이 얼마나 감성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아내이자 작사가인 양인자는 함경북도 나진에서 태어나 부산으로 피란한 유복녀 출신이다. 중학생 시절부터 문단의 주목을 받은 문학 신동으로, 드라마와 소설, 가사를 넘나들며 수많은 명문장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드라마라는 또 하나의 예술 언어를 만든 작가 김수현이 있었다. 그는 음악과 드라마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북돋으며 한국 대중문화의 한 획을 그었다.

한때 잊혔던 노래 한 곡이 다시 살아나기까지, 그 배경에는 이렇게 세 사람의 문학과 음악, 삶이 엮인 거미줄 같은 인연이 있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그 짙은 선율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 어딘가를 은근하게 적시고 있다. 사랑은 사라져도, 노래는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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